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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오래 전에 읽은 소설에 대한 독후감 쓰기 1탄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나는 이 소설을 9년 전에 읽었다. 나에게 그 시기는 이 소설을 읽어야 할 아주 적절한 때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때와 여러 면에서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소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시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부적인 내용은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9년 만에 독후감을 다시 써본다.

1500쪽에 달하는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개망나니인 아버지와 역시 개망나니인 첫째 아들이 싸우다가 싸이코패스 같은 사생아 때문에 둘 다 망하고 그 와중에 무신론자인 둘째 아들은 폐인이 되는 반면 독실한 기독교인인 셋째 아들은 멀쩡하게 남아서 사람들을 교화하는 이야기이다. 다르게 말하면, 온갖 추잡한 인생관과 겉만 번지르르한 개똥철학과 위험하기까지 한 무신론(+합리주의+허무주의)이 뒤엉켜서 이리저리 치고 받고 싸우지만 결국 기독교 윤리가 승리하는 이야기이다.

누구 하나를 딱 주인공이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때로는 극단적이기까지 한 개성을 뿜어내지만, 적어도 나에게 주인공은 둘째 아들 이반이다. 1500쪽이라는 길고 긴 분량 속에 온갖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는 소설이지만, 적어도 나에게 이 소설은 나와 너무나 닮아 있는 인물인 이반이 결국 자신의 사상 때문에 몰락하는 이야기이다.  이반은 철저한 무신론자이자 합리주의자이다. 그는 교회 재판을 교묘하게 비판하는 논문을 내는 "파괴적 지성"의 소유자이고,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말로 대표되는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인물이다.

이 소설을 읽을 당시의 내 머릿속도 이반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한 경멸과 분노, 그리고 허무주의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부모님은 물론 가까운 친척 모두가 기독교도인 집안에서 자랐다. 그때까지 나는 평생 매주 교회에 가고, 매일매일 기도하고, 찬송가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교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신앙심이 아주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독교는 내 내면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고, 나의 아주 큰 부분이었다. 기독교는 내 가족이었고, 내 아름다운 유년 시절이었고, 언제나 기대 쉴 수 있는 안식처였으며, 내 모든 이야기가 쓰여 있는 커다란 책이기도 했다.

하지만 20살 무렵부터 차츰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 기독교 사상에 대한 반감, 내 신앙에 대한 회의가 마음 속에 생겨났고, 21살 때 마침내 교회에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다(교회 수련회에서 전도사가 설교 시간에 "힉스 입자라는 게 발견됐다며? 난 그런 거 안 믿어"라고 말한 순간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공기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던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내 합리성을 믿었다. 내가 보기에 기독교는 온갖 비합리적인 교리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고,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려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포기해야 했다. 신을 믿는 것은, 내가 왜 사는가,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나는 어떤 가치를 믿고 따라야 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따져 묻고 근거를 찾는 합리적인 탐구의 포기를 의미했다. 그 당시에 나는 글을 많이 썼는데, 그중 상당수는 기독교를 철저히 비웃고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이반은 자신의 사상을 가문의 사생아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스메르자코프에게 전달한다. 이를 통해 스메르자코프는 냉혹한 살인마로 거듭나고 표도르와 드미트리를 몰락하게 만든다. 자신이 스메르자코프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빠진 이반은 정신 착란을 일으킨다. 냉철한 지성인이었고 어느 누구보다 강인한 정신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이반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린다. 그의 이성과 논리는 정신적 위기 상황에서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몇 가지 힘든 일이 있었고, 이성이라든가 논리라든가 하는 것들은 아무런 도움이 못 되었다. 여전히 신앙이 있었다면 거기에 기대서 금방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별 일 아니었을 일에도 무너져 내렸다. 게다가 신앙의 상실은 내가 살던 안락한 세계에서 내가 추방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는 독실한 신앙인인 부모님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말하자면 정신적 고아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끼고 의지하던 교회 친구들의 간절한 연락을 나는 눈물을 삼키며 무시해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내게는 공허함만 남았다. 나는 기독교라는 온실 속에서 살았고, 기독교에 기대지 않으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랐다. 어떤 사람을 어디서 만나야 하고, 어떤 일에 성취감을 느껴야 하는지, 무엇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하는지, 고통스러울 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게 멍하니 몇 년을 흘려보냈는데도 여전히 나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정신착란이 온 이반처럼 나는 우울증을 오래 앓았다. 이반처럼 신체적으로까지 죽어가지는 않지만, 정신적으로 죽어갔다.

소설 속에서 마지막까지 몰락하지 않은 인물은 기독교적 가치의 화신인 셋째 아들 알렉세이이다. 그는 자기 형들이 최악의 상황에 빠지는 것 만은 피하게 해준다. 또한 그가 순수한 어린아이인 일류샤와의 사이에서 겪는 일은 무척 감동적인 서브플롯을 이룬다. 둘 사이의 이야기는, 냉정히 따져보면 의도가 뻔히 보이는 도덕주의적 설교이고, 억지 감동을 통한 전도이다. 그래서 철두철미한 합리주의자들은 한바탕 이 이야기를 비웃고 싶어질 것이다. 하지만 뻔한 신파 영화처럼, 머리로는 비웃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노골적인 설교, 노골적인 전도에도 나같은 나약한 인간은, 스스로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했다고 허세부리기만 할 뿐 실은 공허감에 몸부림치기만 할 뿐인 인간은, 이런 뻔한 이야기에도 굴복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굴복은 작중작 <대심문관>에서도 나타난다. <대심문관>은 작중에서 이반이 창작한 이야기인데, 대심문관은 온갖 논리로 재림 예수를 거부하지만 재림 예수는 그에 대해 말 없는 키스 한 번으로 응답할 뿐이다. 대심문관의 긴 논증은, 합리주의를 초월한, 재림 예수의 키스 한 번보다 약하다. 이 키스 장면까지도 이반의 창작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반도 결국 자신의 합리주의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어렴풋이 갈구하고 있는 것 아닐까.

최근에 문득 교회를 다시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텅 빈 마음을 다시 무언가로 메워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생각 뿐이긴 하다. 교회에 다시 다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창조과학 없는 기독교, 반동성애를 외치지 않는 기독교, 문자주의를 걷어낸 기독교를 찾기는 7너무 힘들다. 게다가 더 근본적으로는 내가 절대자의 존재를 다시 받아들이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서도 뭔가 얻어갈 수 있는 게 없나 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어보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증들을 찾아보고, 분석기독교철학 교과서를 이리저리 들춰보고, 도서관에서 현대 신학 서가를 기웃거린다. 결국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그가 만들어낸 알료사라는 캐릭터에게, 약간은 굴복한 셈이다.